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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포스터
  • 전시명이인석 개인展 - 缺: 永遠回歸
  • 전시기간2024년 07월 09일(화) ~ 2024년 07월 14일(일)
  • 관람시간10:00~19:00(화 17:00~19:00 / 일 10:00~17:00)
  • 오픈일시2024. 7. 09.(화) 18:00
  • 장 소3전시실
  • 장 르서양화

전시정보

작가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의 기조 위에 지난 삶의 기억으로부터 소환한 이원론적 에피소드를 투영하여 힘에의 의지로서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긍정적 삶의 태도를 작가 특유의 독특한 화법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인석, 해를 삼킨 바다2

 

이인석, 힘에의 의지2

 

 

 

작업노트

 

나의 작업은 굳이 정연한 논리나 개념에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업 구상이 직관적이고 즉흥적일 때가 많다. 대다수 작업은 삶의 기록으로부터 소환된 기억의 파편들로 이들은 캔버스나 패널에 올려지는 소재가 되고 질료가 되어 동일한 주제나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의 변주를 꾀하며 각각이 오롯한 주연으로 등장한다. 이때가 바로 나만의 예술 형질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먼저 작품의 제작방법으로써 건축현장에서 체득한 질료인 퍼티와 부직포(Putty & Non-woven fabric)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캔버스와 패널에 올려 굳히고 갈아내고 녹여내는 과정에서 날것 그대로 자연스럽게 이지러지고 갈라져 생성되는 틈을 나는 '缺(Split)'이라 정의한다. 이 '결'의 의미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시간과 빛의 온도 등 물리적 외력에 의해 일어나는 갈라짐의 점진적 변화나 상승을 뜻하며, 틈과 틈 사이의 면면 또는 공간과 공간으로의 이동이나 연결의 의미로서, 단순히 ‘갈라져 분리 또는 구분된다.’라는 가시 현상의 부정적 의미보다는 ‘이동과 연결, 확장’이라는 긍정을 찾는 매개이자 소통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가 더 강하게 부여되어 있다. 하여 나의 작업은 삶의 시련에서 추출된 상흔이 핵심 질료가 되어 비정형의 구성을 정연화 하는 작업으로 화면을 확장해 간다. 이렇게 스스로 체득한 기법인 결은 바로 내 삶의 태도가 각인된 메타포(metaphor)이며 작업의 시그니처(signature)로서 이를 통하여 고정관념의 프레임에 갇혀있던 가시 세계의 단순한 형태 묘사에서 벗어나, 더욱더 자유롭고 직관적이며 역동적이고 담대한 개념이 함의된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구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작업 전반을 지지하는 대주제인 '缺:永遠回歸(결:영원회귀)'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사상의 기조 위에 녹록지 않은 지난 삶의 기억으로부터 소환한 슬픔과 기쁨, 고통과 안식, 빛과 어둠,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등 이원론적 에피소드를 대입하여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염세적 태도에서 벗어나고자 고통의 원인을 과거로부터 소환된 사건으로 핑계 대는 구차한 삶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극복해 나감으로써 현재가 과거를 새롭게 규정지을 수 있다는 긍정적 삶의 태도를 독특한 조형 화법으로 풀어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캔버스는 내가 사는 대지(大地)이다.(The canvas is the land where I live)'라고 정의해 본다. 이 대지 위로 내 삶의 가치와 이상을 한결 한결 그려 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퍼티와 부직포에 버무려진 고통과 시련이 질료가 되고 이것을 갈아내고 녹여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형상은 파란 했던 삶의 상흔이며, 앞으로도 녹록지만은 않을 남은 날의 나의 모습으로 은유 된다. 결국은 대지 위에 굳건히 다시 서는 성장의 흔적으로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서사(書史)인 셈이다. 더하여 내가 행하는 작업행위는 나의 삶 그 자체의 모습이며 더 섬세한 예술적 감성과 더 건강한 자유 정신이 발휘되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다. 이 과정으로 생성된 대지 위의 조형은 물아일체(物我一體) 즉,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리하여 '결'의 기법을 통하여 ‘호,작,질(好,作,質: ‘好’-좋아하는 것, ‘作’-짓거나 만드는 것, ‘質’-물질이나 형상의 바탕이 되는 것) 하는 반복 행위는 결코 무미건조하고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 그리고 싶은 것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물질이나 형상의 본질을 찾는 것은 물론,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삶의 여정인 것이다. 이는 대주제인 '缺:永遠回歸(결:영원회귀)'로 귀결되며, 이렇게 반복하는 ‘호,작,질’은 새로운 창작을 위한 조형 언어로서 내 안의 무의식 세계를 순환하는 예술적 사유와 가치를 탐구하는 힘에의 의지 작용으로 나의 예술적 정체성을 표징 하는 표상이 되는 것이다.

 
이인석 YI, Einseok
 
 

 

전시 비평

이인석의 大地 회화에 관하여

 

정종구 시각예술비평가

 

불은 기운(vitality)이다. 불이 물질을 태울 때 강한 열과 함께 화려한 스펙트럼의 빛을 생성한다. 불은 미술가 이인석이 최근 즐겨 쓰는 매체이다. 불이 발산하는 화려함에 비하면 그의 작업 결과물은 흑백이 주류인 엄숙한 침묵과 정적, 혹은 평안일 수도 있는 단조로움이 지배적이다. 작가의 또 다른 작업 과정으로서 ‘덧칠하기’와 ‘갈아내기’의 신체 행위도 이러한 침묵의 정서에 일조한다. 그는 화려한 불과 활력으로 우리에게 침묵의 정서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인석의 회화는 대지(大地)를 닮았다. 자연의 넓고 큰 땅을 경작하며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이인석이 설계한 땅은 한 방향으로 반복하는 선의 리듬을 포함하거나 무리를 이룬 짧은 선의 조합, 단순한 색상과 동세, 신체 행위의 흔적으로 구성한 패널 회화의 형태로 관객을 마주한다. 작가는 작업 노트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극복해 나감으로써 현재가 과거를 새롭게 규정지을 수 있다는 삶의 태도를 자신의 화법으로 삼고 그 작업의 처소인 캔버스를 ‘대지’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것은 땅을 밟고 서 있는 인간의 삶과 미술 행위를 동등한 위계 가치로 인식한 것이다. 가까이서 살펴본 그의 회화는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추상적인 상징과 매끈하지 않은 질료를 논밭의 고랑처럼 경작한 땅의 표면 같기도 하다.

 

그의 미술은 연금술을 닮았다. 삶의 태도와 화법에서 그렇다. 흔하고 가치 없는 납에서 금과 같은 귀금속을 만드는 연금술은 원소의 성질을 변화시키면 다른 원소로 바꿀 수 있고,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의 비율을 바꾸면 다른 물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기본 이론이다. 비록, 연금술이 금을 만드는 일에 실패하고 비과학적 학문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납을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생각은 ‘사람도 잠재력을 끌어내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할 수 있다’라는 계몽을 불러일으켰다. 철학적인 면에서 연금술은 금속이나 물질의 제련을 통해 연금술사 자신의 영혼을 더 높은 상태로 이끄는 행위였고,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일깨우는 지성이었다. 이인석의 미술 행위는 이같이 자신을 긍정하고 고양하는 태도를 바탕에 둔다.

 

작가가 부직 섬유와 배합 물감을 사용하는 것은 재료의 성질을 변화시켜 새로운 가치의 회화를 만들겠다는 사고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이 시도는 전통적인 회화의 재료와 방법을 전복하고 연금술의 궁극적인 그것처럼 회화의 면모를 새롭게 제안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굳어서 강화된 배합 물감을 사포로 갈아서 감춰진 밑바탕의 색이 드러나게 하거나 부직 섬유를 불로 녹여 만든 고랑의 선이 리듬을 만들고 섬유류 사이로 삐져 솟아오른 배합물이 흔적을 만드는 행위이다. 일면에서 그의 미술 탐구는 본질주의적이다. 즉, 그는 ‘회화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 질문에 대하여, 물질의 배치와 구조를 현묘하게 구성하는 경영위치(經營位置)라는 측면에서 회화를 해석하고 답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답을 탐구하는가? 혹시, 그가 “지금의 미술 혹은 회화가 자기 고유의 문법을 상실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나? 그럴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의 미술 행위는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요소를 남기는 방식으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가 제시하는 회화는 이렇다. 첫째 그림을 지지하는 바탕과 그 위에 물성이 있고, 둘째 그 물성이 두께와 면적을 가진 공간 구조를 형성하며, 셋째 그 구조가 잘 드러나도록 최소한의 색을 사용하여, 넷째 ‘만들다’라는 신체 행위로 논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만들다’는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라 만드는 이의 행위 시간과 행위 자체를 논의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회화의 본질일 수도 있는 이 개념, 과정으로서 ‘행위와 시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미술에서는 결여한 성질을 자신의 회화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의 미술이 결여한 성질들, 화법과 행위와 시간의 가치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제안을 수용하여 해법을 구하자면 이런 화법을 기억할 수 있다. 500~535년경 중국에서 활동했던 사혁(謝赫)의 '고화품록'에 소개한 육법이다. “첫째 기운(氣韻)이 생동하며, 둘째 윤곽을 그리는 데 붓의 법칙이 있고, 셋째 사물에 대응하여 형상을 정확히 재현하고, 넷째 그리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채색이 적절하고, 다섯째 사물을 배치하고 구조를 현묘하게 구성하여, 여섯째 모사함에 화가의 정신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라는 옛 그림의 문법이 대안인데 작가의 생각은 알 수 없다.

 

철학자 다카쿠와 가즈미가 예술은 인간의 오감을 갱신하는 저항 행위라고 말했다. 이 행위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각을 매개로 한다. 이인석의 회화를 만나는 것에서 비롯되어, 화려한 불에 가려져 흩어져 보이는 지금 여기의 세계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앞으로도 우리가 자신을 직면하는 서사(敍事) 행위를 지속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