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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포스터
  • 전시명정익현 개인展 - IL MARE_Wave
  • 전시기간2023년 10월 24일(화) ~ 2023년 10월 29일(일)
  • 관람시간10:00~19:00
  • 장 소3전시실
  • 장 르한국화

전시정보

심연이라는 주제에 연속작품 IL MARE_Wave로 내면의 세계를 색과 긴 호흡으로 캔버스라는 대지 위에 단조롭지만은 않은 웨이브로 담담히 펼쳐보았다. 찰나의 순간 내면의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Il Mare Wave: 자신들이 가진 신비로 돌아가라.

 

정익현(鄭益炫) 작가는 심연(深淵)을 주제로 회화작업을 지속해온 중견 작가이다. 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연작은 시간을 통해서 변화를 거듭했는데, 올해 2023년에 선보이는 작품은 형식면에서 더욱 물오른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불과 1년 전인 2022년 대구달성문화센터에서 선보인 개인전의 작품과 천양(天壤)의 차이로 발전한 모습이다.

 

작년에 작가는 전시회에 앞서 “심연에서 올려다본 수면, 금빛ㆍ은빛 빛오라기(빛줄기)를 잡고 힘껏 두둥실 몸을 띄운다. 넘쳐나는 걱정, 욕심, 두려움도 버려야 도달하는 그곳에서, 어느새 나는 봄날의 윤슬이고 싶다."라고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봄날의 윤슬”이란 저 멀리 빛에 비춘 잔물결 때문에 일렁이는 빛의 춤을 말한다. 우리는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내면에 여러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의식(self-consciousness)으로 외부세계를 바라본다. 자의식은 나이면서 동시에 참된 내가 아니다. 우리 철학에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는 말이 있는데, 마음이라는 바다는 성(性)과 정(情)이라는 물을 모두 통솔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순수하고 맑은 성(性)은 가끔 일어나기는 하지만, 심을 어쩌지 못한다. 주지하다시피 성(性)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우리는 정을 극복해 참된 성을 실현하는 것을 가리켜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배웠다. 그런데 자의식은 바다이다. 자의식이라는 바다는 주위의 모든 것(외부세계)을 덮을 수 있을지언정 자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래적으로 불행을 달고 온다.

우리 동아시아의 고전 논어(論語)의 첫 구절은 “때대로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시작한다. 신플라톤주의의 개창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 c.204-270) 역시 “너의 내면을 지속적으로 절차탁마하여 조각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진정한 덕성이 없다면, 신은 명목상의 허울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동서양의 성인들 모두 내면의 참된 본성을 닦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플로티누스의 철학을 가리켜 한마디로 헤놀로지(Henology)라고 한다. 토 헨(to hen)은 하나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이다. 따라서 헤놀로지는 하나에 관한 학문이라는 뜻인바, 플로티누스가 말하는 하나는 단순히 한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했을 때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익현 작가가 말하는 바다이다. 모든 존재의 관계 전체가 바로 세계이고, 세계는 바다로 비유되는 것이다. 그 세계에 우리의 내면까지 포함된다.

 

바다라는 대양은 모든 포말을 귀속시킨다. 그러나 바다라는 대양에 의해서 작은 포말 하나라도 바다가 아닌 경우가 없게 된다. 반면에 바다라는 대양은 작은 포말에 의해 비로소 구체성을 띄게 된다. 즉, 정익현 작가가 바다를 그려서 나타내려 하는 것이 태초부터 우리 안에 구유되어 있는 잠재된 신성이다. 정익현 작가는 플로티누스의 사상적 후예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철학을 염두에 두면서 음미하고 체득하여 그림으로 실천하여 표현한다. 정익현 작가의 작가노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높은 산, 바다의 넘실대는 파고, 강물의 드넓은 조류와 별들의 운행들을 감탄하기 위해 떠나는데, 정작 자신들이 가진 신비는 머무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다.

 

우리의 내면은 모든 것을 원만자족하게 갖추고 있다. 자의식은 북송의 장재(張載)가 제창한 심통성정(心統性情)에서의 마음[心]일 것이다. 마음[心]은 바다이다.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 크고도 넓어서 여러 가지 모습을 포괄하고 있다. 칠정(七情)과 같은 희(喜)ㆍ노(怒)ㆍ애(愛)ㆍ락(樂)ㆍ애(哀)ㆍ오(惡)ㆍ욕(欲)의 파도가 몰아치는가 하면 사단(四端)과 같은 신성이 깃들어있기도 하다. 따라서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는 나그네길 잠시 머물던 곳을 떠나서 영원히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려 하네.

 

나그네길 잠시 머물던 곳[逆旅之館]은 우리 인생이다. 영원한 본래의 집은 어디일까? 내 마음 속의 신성이며, 아름다운 양심의 공간이다. 이를 우주 밖 어디쯤 우리가 왔던 본래의 곳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정익현 작가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해서 말한바 “자신들이 가진 신비”와 정확히 같다.

이쯤 되면 정익현 작가가 그리려는 바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체감될 수 있다. 정익현 작가의 모든 그림은 이중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바탕에 푸른빛의 심연이 바다와 같고,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붉은 바탕이나 백색 바탕이나 녹색 바탕이나 모두 바다와 같이 깊은 심연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 내재되어 있는 황금의 여울이나 봄날의 윤슬이 잠재적 가능성을 암시하는 구조이다. 바탕(바다)은 현실태이고 황금의 윤슬은 가능태이다. 우리가 언젠가 가야하는 목표이다. 현재 잡거나 짚을 수 없더라도 언젠가 영원히 돌아가야 할 우리의 본연이다.

정익현 작가의 2022년 전시가 추상표현주의적 성향이 강했다면, 올해의 작품은 정념을 발라내고 굳건한 의지로써의 구성력을 옹골지게 배가시켰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특히 라는 작품은 중앙에서 한 개 상층부에서 두 개의 푸른 소용돌이가 주위의 시선과 분위기를 빨아들이는데, 금박의 황금 윤슬은 각각 상층부와 하단의 기층에서 다시 빛을 관객을 향해 발산하고 있다. 정익현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바다가 모든 것을 통솔한다 할지라도 마음이 정제되고 나타(懶惰)가 걷히는 순간 홀연히 신성의 빛이 드러난다는 동서양에서 살았던 옛 사람의 가르침이 차례로 떠오르는 것이다.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자동기술에 의해 그려진 녹색 바탕은 기세와 운율이 충색되어 화가의 손이 춤을 추는 가운데, 정제된 금박의 표면이 충천(衝天)하는 기세의 모든 에너지를 차분하게 달래주고 있다. 끝으로 은 수직이미지가 유달리 강조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높은 음가의 소리를 느끼게 해준다. 자줏빛의 하단부와 황금빛이 분리된 가운데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상승하는 일곱 개의 선은 두 개의 층위를 관통하고 있다. 그 느낌이 강렬하다 못해 스산하다.

 

정묘년(427년) 구월, 날씨는 차고 어두운 긴 밤, 쓸쓸하고 스산한 바람만 불어온다.

 

여기서 도연명은 스산한 구월을 가리켜 거문고 음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음 무사(無射)로 표현하고 있다. 음력 구월은 우리로 치면 시월이고 스산하고 춥기 때문이다. 악기의 높은 음가의 소리에 빗대어 계절의 스산함을 표현했듯이, 정익현 작가는 일곱 개의 상승하는 선으로 스산한 분위기를 나타냈다.

모노크롬이나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들, 가령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6)ㆍ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ㆍ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ㆍ어그네스 마틴(Agnes Martin, 1912-2004)ㆍ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와 같은 작가들은 인문학의 귀재였다. 추상회화는 인문학에 물길을 대지 않으면 풍요를 수확할 수 없다. 정익현 작가 역시 대가들과 같은 방향으로 수맥을 댄다면 늦지 않게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진명, 큐레이터ㆍ미술비평ㆍ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