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SAN
CULTURAL CENTER
전시일정
전시
전시일정
전시검색
- 전시명대구추상, 모험과 실현의 순간들展
- 전시기간2022년 08월 05일(금) ~ 2022년 09월 03일(토)
- 관람시간10:00~18:00
- 오픈일시2022년 8월 5일(금) 19시
- 장 소1전시실
- 장 르서양화
전시정보
봉산문화회관기획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 - 2022 문예회관 전시 기획프로그램
역사조명 특별기획
대구추상, 모험과 실현의 순간들展
■ 전 시 명 : 역사조명 특별기획 대구추상, 모험과 실현의 순간들展
chapter 1. 대구 추상미술의 출발_2층 3전시실
정점식, 장석수
chapter 2. 추상표현의 다양화_3층 2전시실
서석규, 이복
chapter 3. 추상미술의 확산_3층 1전시실
박광호, 김구림, 유병수, 이동진, 이영륭
chapter 4. 디지털 아카이브_3층 2전시실
오정향
■ 관람일정 : 2022. 8. 5.(금) ~ 9. 3.(토), 월요일 전시없음
■ 관람시간 : 10:00~18:00
■ 오 픈 일 : 2022. 8. 5.(금) 19시
■ 장 소 : 1~3전시실(2~3층)
■ 참여작가 : 故정점식, 故장석수, 故서석규, 故이복,
故박광호, 김구림, 故유병수, 故이동진, 이영륭, 오정향
■ 협력기획 : 김영동(미술평론가)
■ 기 획 : 봉산문화회관
■ 주 최 : 봉산문화회관,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 주 관 : 봉산문화회관
■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문 의 : www.bongsanart.org, 053-661-3500
페이스북(bongsanart), 인스타그램(bongsanart_), 트위터(@bongsanart)
※ 이 전시는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문예회관 전시 기획프로그램이며,
사업비 일부를 문예진흥기금으로 지원 받았습니다.
※ 문화소외계층의 단체관람프로그램은 사전 문의 바랍니다.
전시 소개
「대구추상, 모험과 실현의 순간들展」을 준비하며...
봉산문화회관은 매년 여름 동시대 미술이 지역민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특별한 기획전을 마련해 시각예술의 참재미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지금까지 꾸준히 축적해온 기획전시 “기억공작소”, “유리상자-아트스타 공모전시”, “GAP(Glassbox Artist Project)展”, “또 다른 가능성展” 등의 전시 내용을 함축하고 정리하며 우리 회관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보는 기획전을 선보였다. 동시대 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적 정보와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들의 각기 다른 인식을 상호 연결하는 감각적인 표현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이 가중될수록 지역 미술의 근원에 대한 파악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오늘날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다가왔다. 지역과 밀접할 수밖에 없는 구립문화회관의 특성도 그렇지만, 지역 미술의 발전적 고민과 더불어 미래를 설계하고 방향을 잡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것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번 전시의 추진 배경이다. 비록, 전시 여건의 한계로 지역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 모두 포함하지 못했지만, 대구가 근대미술에서 모던아트로 넘어가는 격동기 중요한 변화 시점을 축약적이나마 담론을 이어가다 보면, 시대적 상황의 큰 맥락의 이해와 작가들의 작품과 생애 속에서 변화에 대응하는 태도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적 사료나 근거, 그리고 배경지식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 미술사 연구 분야의 협력을 통해 대구미술사의 변곡점을 되짚어보는 이번 전시를 기획할 수 있었다.
모험의 시작
한국현대미술은 1950년대 말 앵포르멜에서 1970년대 컨템퍼러리운동까지 획기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다. 한국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딛고 문화 활동의 재개뿐만 아니라 전후 인간이 갖는 공통적인 감정의 이입, 개방적 자세로 국제적 흐름까지 수용하는 변혁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간접적이며 수동적인 방식의 미술수용과 도제식의 접근방법이 아닌 작가의 감정이 담긴 표현적 미술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변화의 욕구가 분출했다. 특히, 전후 죽음과 생의 비통함을 대면하며 기성 체제에 대한 불신과 표현의 한계성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고 앵포르멜, 액션페인팅, 초현실주의 등에 관한 이해와 정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이 구축된 결과였다. 이러한 현대미술운동은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화단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모던아트협회」와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미술전」 등을 들 수 있다.
대구에서는 1940년대 말부터 개성적인 표현양식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자연주의 미술이 주류이던 시기에 정서적인 주제를 특유의 조형언어로 추상적인 해법을 실현한 정점식 작가와 태평양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하고 현대미술의 이론적 토대 위에 구축한 추상미술을 선보인 장석수 작가의 작품을 [chapter 1. 대구 추상미술의 출발]
정점식 작가의 서정적이고 함축적인 추상이 돋보이는 1957년 작품 <모자(母子)>부터 1989년 원숙기에 제작한 <밤의 노래> 등 자유로운 서체적 리듬감의 필적이 절제되고 격조있는 조형요소들로 표현된 작품 7점과 드로잉 2점을 선보이고, 장석수 작가의 비정형적이고 비대상적인 극적 앵포르멜 경향이 담긴 1960년대 작품 <무제>, <작품> 등 6점과 드로잉 2점을 전시하여 격정적이고 우연적인 자유 의식이 돋보이는 대구추상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석규 작가의 강렬함 속에 나타나는 율동적인 붓질로 인물 군집의 형상을 표현한 1960년에서 1970년대 사이 대표 작품 <귀로>, <난무>, <윤희> 등부터 2003년 작품 <백운동의 가을>에 보여주는 감성적 풍경까지 8점이 전시되어 과감한 생략과 과장된 표현 속에 작가만의 감성적인 색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이복 작가의 두텁게 칠한 거친 물감과 투박한 선으로 형태 변조를 무게감 있고 강렬하게 표현한 1960년대 대표작 <수상(隨想)〉을 비롯한 풍경 시리즈 4점을 선보이며 작가 특유의 자유로운 평면적인 조형의식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실현의 순간들
1950년대 말 서울의 대학을 다닌 박광호, 이동진, 유병수, 이영륭 등과 새로운 예술개념으로 무장한 김구림의 등장은 실험적인 추상화로의 열기를 더욱더 고조시키게 되며 추상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chapter 3. 추상표현의 확산]에서 그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박광호 작가는 화면의 조형적 분할을 통한 기하학적인 추상적 형태 위에 은유적인 이미지를 배치하여 당시 화단에서는 보기 드문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선보인다. 대표작인 1970년대 작품 <알파와 오메가>, <생동>과 1950년대 말 기하학적 추상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콤포지션 G> 등 총 8개 작품을 선보이며 인간의 정신적 내면세계를 탐닉하는 작가만의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포스트모더니즘과 실험미술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는 대구에서 1959년 첫 번째 개인전과 1964년 《앙그리》 2회전까지 활동하며 당시에도 동시대 미술의 전개와 맥락을 이해하는 실험적 화풍을 선보였다. 파괴를 통해 창조를 보여주는 백색화면 시리즈 1964년작 <작업(work)>, 추상적이고 유기적이며 임의적인 작품 제작 형식 <핵(nucleus)>, 1990년 뉴욕 체류 시 제작했던 생명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보여주는 <음과 양(Yin and Yang)> 시리즈 작품과 영상미디어 등 총 8개 작품을 전시한다.
이동진 작가는 1960년대 《벽전》과 《벽동인전》 창립 동인으로 초대작가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이후 1980년대 와서 대구와 인연을 맺는다. 초기 앵포르멜 회화와 실험적인 오브제 중심의 작품을 제작하며 당시 전위적인 현대미술의 경향을 보여줬던 1970년대 <원전> 시리즈와 <자연의 이미지> 등 7작품을 선보이며, 초창기 새로운 재료를 탐구하는 추상의 형식적 태도를 보였던 작가의 작품들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유병수 작가는 질료의 효과를 탐구하고 유기적인 화면분할과 자유분방한 드로잉 속에 본능적 행위를 반영하는 추상을 선보였던 작가로, 이번 전시에서 1960년대 비정형적인 채색화면에 나타난 자유로운 조형성이 발현된 작품 5점과 특유의 선이 붓질로 표현된 1978년 작품 <선의 이미지-78> 와 갈색 톤의 색 번짐을 통한 공간분할을 선보인 작품 1979년 작품
마지막으로 이영륭 작가는 1961년 대학교 재학 중에 상공회의소 화랑에 첫 개인전을 펼치며 지역 예술계에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벽전》, 《벽동인》 창립동인으로 활동하고, 일찍이 귀향해 《앙그리》 창립과 이후 《신조회》와 《원로화가회》 창립 등의 활동으로 지역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준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 초창기 작업인 1959년 작품 <무제>를 시작으로, 대담한 화면구성과 질료의 중첩으로 현시점에서 봐도 중후한 색채대비로 긴장된 화면과 역동감을 보여주는 1960년대 작품 <정토(淨土)A-103> 외 3점, 그리고 1973년 <生>, 1987년 <인연(因緣)>을 통해 이후 강렬한 청색추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다시 보기
격동의 시대적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대구추상미술 역시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었으며 도전과 실현의 의미가 함축된 실존적 투쟁의 순간으로 오늘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지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시선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미디어아티스트 오정향 작가를 초대하였다. 인터랙티브, 미디어파사드, 홀로그램 등 다양한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의 시각으로 근현대작가들의 추상미술을 재해석하는 미디어아트와 모든 연령의 관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프로젝션 맵핑으로 움직이는 아카이브를 구현해 실물 아카이브와 함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장이 [chapter 4. 디지털 아카이브]이다.
대구추상미술의 출발, 추상표현의 다양화, 추상미술의 확산 그리고 디지털 아카이브까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1950년대 말 추상미술 도입기부터 1970년대 또 다른 젊은 세대의 컨템퍼러리 운동 이전까지의 이야기로 구성한다. 추상화의 시대성에 초점을 맞춘 전시로 당시 작품의 경향과 예술적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거울을 바라보며 미래를 비춰보는 뜻깊은 전시로 기억되길 기대한다.
봉산문화회관큐레이터 조동오
작가별 소개
chapter 1. 대구 추상미술의 출발_2층 3전시실
故정점식, 故장석수
극재 정점식(1917~2009)
독자적으로 추구한 추상의 길
경북 성주 출생인 정점식은 자연주의 미술이 주류이던 시대 성장기를 독학으로 보내면서 1940년대 말 1950년대 초의 작품들에서 벌써 모더니즘적 조형주의로의 지향을 보여주었다. 서사적인 주제를 통해 추상적 조형 언어를 탐구하면서 정서적 취향을 회화적으로 실현한 추상 작가다.
1936년 ‘남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면서 대구화단에서 첫 활동을 시작한 이래 1941년 멀리 북만주로 가서 해방 후 1946년 대구로 귀환했다. 그즈음 제작한 〈바다 풍경〉(1946)과 1947년에 제작한 〈두 여인〉을 보면 형상이나 구성을 단순화시킨다든지 바탕의 마티에르가 강조되면서 지적인 추상화로의 진행됨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의 단순화와 화면 바탕의 질료를 탐구하는 개성적인 특징이 1950년대 후반에는 〈두 사람〉과 〈상황〉, 〈실루엣〉 등에서처럼 함축적인 추상으로 결정화된다.
1953년 미국문화관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당시 문단의 모더니스트 작가들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그 전시에 출품되었을 <계성고 풍경〉(1953)은 표현주의적인 특징이 현저하다. 이듬해 계성학교 교사가 되고 관행적인 화풍에 저항하는 참신한 지성이 담긴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훗날 “사방의 공격으로부터 추상을 지키며 이해시키는데 진력했다.”라고 당시의 소회를 밝힌 바 있지만, 그러나 추상을 옹호한 것을 넘어서 추상화의 미학적 가치를 실천으로 구현해나갔다. 1960년대에 〈카리아티드〉와 〈매장〉 등에서 개성적인 자신의 기념비적인 양식에 도달했다.
1970년대 원숙기 작품들은 유연하고 자유로운 리듬의 서체적인 필적이 지배하는 특유의 화면을 향했다. 그의 후기에 다양한 표현들은 지성과 절제되고 균형 잡힌 태도를 느끼게 한다. 자유로운 유희처럼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는데 격조 있는 미학의 배경에는 추상표현주의의 여러 조형 요소들인 오토매틱하고 서체(캘리그래피)적인 기법이 널리 응용되고 있다.
장석수(1921~1976)
앵포르멜(비정형, 비대상회화)의 실천
경북 영일 출생인 장석수는 장기초등학교와 교토의 동산중학교를 거쳐 1943년 태평양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했다. 일제 말기 조선미전과 해방 후 국전에 출품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대구여중을 시작으로 대구여자초급대학을 거쳐 영남대학 재직 중 작고할 때까지 강단에서 미술교육과 현대미술이론을 가르쳤다. 동시대 서구미술의 흐름과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자주 지상에 기고했는데 한국의 추상미술이 서구 사조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나 감각적, 심정적 접근으로 인해 논리적으로 허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던데 반해 장석수는 풍부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추상미술을 전개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다가 후반에 가서 비대상 추상회화로 극적인 전환을 보인 후 그로부터 약 10년간 앵포르멜 미술의 실험적인 작업에 진력했다. 그의 앵포르멜 회화는 당시 다른 추상 작가들과 달리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 추상인 비정형 회화를 실천했다. 1958년 작 〈사정(射程)〉과 1959년 〈단절〉 등의 작품은 표현주의에서 단박에 격정적인 추상표현주의의 화면으로 전환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1970년대 다시 형상적인 이미지로 복귀하게 될 때까지 앵포르멜 작품에 열정을 쏟았다.
1960년대 작품에는 물감의 번짐과 흘림 효과를 확장하여 사용했다. 대형 화면에 붓질의 흔적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지만 화면의 곳곳에 물감의 우연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타시즘’기법의 활용도 보인다. 이러한 기법들은 당시 예술에서 자유 의식의 급진적인 실천 방식이었고 또한 실존주의와 아방가르드적인 정신에 대응한 것이었다.
chapter 2. 추상표현의 다양화_3층 2전시실
故서석규, 故이복
서석규(1924~2007)
현실에 관한 관조적 시각과 추상화(抽象化)
일찍부터 그림에 취미와 소질을 보인 서석규는 1939년 대구해성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실기 수업을 받았다. 일제 말기 1943년 전쟁의 여파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해방이 되자 1945년 10월 ‘조선유학생동맹 대구지부’ 발족에 참여하여 국가 건설을 위한 계몽과 문화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47년 1월에는 대구시보사가 주최하는 전재민 구호 미술전람회를 서돈학 등과 함께 개최해 작품 활동과 사회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서석규의 초기 작품의 성격은 1943년 작 건물 풍경을 단순화한 〈수녀원〉과 또 한 작품,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상반신 측면 〈여인 누드〉에서 보면 모두 아카데믹한 재현보다는 구성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이다. 1949년의 〈자화상〉은 격동기의 사회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듯 명백하게 표현주의적인 양식으로 바뀌었다. 거친 붓질과 두텁게 바른 물감의 층이 불안한 요소를 고조시키며 마치 1950년 전쟁을 예감이라도 한 듯하다. 한국전쟁 중에 그린 일련의 작품들은 거칠고 혼란스러운 붓질로 추상화되어 현실의 참담함을 훨씬 더 잘 느끼게 한다.
대건중과 대구여고에 재직했고, 1965년에는 현대미술학원을 설립하였다. 중앙집권적이던 시대 도전을 만들어 지방 미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대구문화예술회관 건립에 초석을 다졌다. 경북문화상(1972), 금호문화상(1979), 한국예총 중앙회 예술상(1987), 제1회 대구예술인상 대상(2002) 등을 수상했다. 1950년대부터 추상적 요소가 짙은 작업을 하면서 앵포르멜(Informel) 양식으로 나아갔으며, 1972년 신조회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다. 후기에는 풍경화에도 과감한 생략과 과장을 시도한 비구상적인 표현을 보여준다. 전 시기를 거쳐 작가가 애정을 가진 산과 바다 등 자연 묘사에는 단순한 화면 구상과 감성적인 색조가 나타난다. 공공 예술의 효시가 될만한 벽화 작업을 다수 수행해 실용예술과 순수예술 간의 벽을 허무는 데도 크게 공헌했던 작가다.
이복(1927~1975)
“거친 붓질과 감미로운 색채의 교향시”
(1962년 이복 개인전에 대한 정점식의 평)
경북 왜관 출생인 이복은 도쿄의 구단중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제국미술학교 양화과로 진학했다. 재학 중에 《이과전》에 두 번이나 입선할 만큼 그림에 열심이었으나 태평양전쟁 말기여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대구서 교편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자연주의적인 화풍이 주류이던 1950년대 대구지역 화단에서 표현주의의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하면서 양식상의 혁신을 추구했다. 강렬한 원색과 형태를 단순화한 자연의 모티프로 일찍이 재현적인 그림에서 벗어났었는데 대학교 1학년 때인 1944년 유화 작품(풍경 속에 사생하는 인물이 있는 그림)에서부터 그런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인 좌상>(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은 두텁게 칠한 물감의 거친 마티에르(matière) 바탕 위에 대담하고 강직한 선묘로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가 평면화와 구성적 의도가 역력해 보인다. 신체의 양감과 배경 공간의 깊이감이 제거된 조형적 특징과 거친 질감, 투박한 선의 격정적인 표현성이 바로 이복 회화의 개성이다.
1960년대 추상화(化)를 더욱 진전시켜 〈숲〉(1969)과 같은 비구상 화면으로 나아갔어도 이복은 구상적인 요소를 아주 배제한 순수한 추상주의보다는 자유로운 조형을 추구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구상을 지향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1962년 작 〈수상(隨想)〉 역시 중후한 유화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 반(半)구상적 이미지를 구현한 것으로서 그의 추상화의 한 단계를 보여준다. 1956년 제1회 개인전을 가졌고 1952년 제1회 <대구화우회전>부터 1956년 〈대구미술가협회 창립전〉, 1960년 「양화팔공회」 그리고 1972년 「이상회」 등 그룹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chapter 3. 추상미술의 확산_3층 1전시실
故박광호, 김구림, 故유병수, 故이동진, 이영륭
박광호_알파와 오메가, 1971, 204x204cm, oil on canvas
향보 박광호(1932~2000)
초현실주의 및 상징주의적 추상
박광호는 대구에서 태어나 수창초등학교, 대구중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진학 1956년에 졸업했다. 계성고와 대구교대에 재직하면서 일찍부터 서울의 ‘앙가주망’ 그룹과 대구 신조회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다. 회화적 주제로 인간의 정신적 내면세계를 탐색하며 상징적인 조형 표현에 일관된 개성을 보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추상적인 화면 위에 은유적인 이미지를 탐구하면서 독자적으로 당시 화단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벗어난 초현실주의적인 양식을 개척해 나갔다. 원초적인 생명의 기호들을 개발하고 그 패턴들을 추상적인 형태의 공간 속에 융합하면서 재현주의와 형식주의를 넘어선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했다.
나아가 1960년대 그는 서구 모더니즘 후기의 다양한 양식을 실험한 흔적을 차례로 남겼다. 1963년 작 <풍화>는 앵포르멜 양식에 더 가까운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캔버스 바닥에 물감을 뿌리고 흘린 흔적과 두텁게 마티에르를 형성한 위에 거대한 얼굴 형상을 나타내 당시 한국 화단의 비정형 추상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후 일련의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 몇 점을 더 제작했는데 그러나 곧 기하학적 추상의 느낌이 강한 옵티컬 아트의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비정형적인 추상화에서 벗어났다.
그의 예술에서 초현실주의적 성향은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시와 단편소설 등과도 연관이 있는데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학적 주제와 연관된 초기작을 비롯해 전 생애에 일관되게 이어진 우주의 원리와 리듬을 담은 향(響)·괘(掛)·군집·음양 시리즈 등이 제작되었고, 인간의 무의식에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담은 결(結) 시리즈, 문자와 기호의 조합 등을 회화작업으로 시도하였다.
김구림_Yin and Yang90-L32 음과양90-L32_1990_Acrylic, Magazine on Canvas_213x351cm
김구림(1936~ )
실험미술과 전위예술의 첨병
한국 포스트모더니즘과 실험미술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는 김구림은 1959년 대구공회당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었다. 당시 백락종은 서문에서 “모든 시대의 유행어를 이해하고...무형상에서 필연성을 띈 또 하나의 무형상을, 형상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형상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창조하는 모색을 즐기고 있다”라고 썼다.
1963년에는 대구의 젊은 작가들로 구성된 ‘앙그리’라는 저항적인 이름의 그룹을 창립해 이듬해 2회전까지 이끌었다. 1967년에는 제2회 개인전을 부산공보관에서 개최하였고 이후 한국아방가르드협회 창립과 1970년 전위예술 그룹인 제4집단 결성을 주도하는 혁신적인 미술 활동을 펼쳐왔다. 당국으로부터 급진적인 작품 활동의 제지가 있자 일본으로 건너가 시간성에 대한 설치작품을 발표, 일본화단에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미국 체류 기간에 브루스 나우만 등과의 그룹전에 참가하였고 현대미술관들의 초대로 음양사상에 대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으로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베이징 민생현대미술관, 상하이 OCAT, 싱가포르미술관,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 등 국제적인 미술관들의 초대전에 참가하였다.
런던 테이트모던 필름 스타오디토리움, 독일 오버하우젠 64회 단편영화제에도 그의 필름이 초대받았고 도쿄 판화비엔날레, 파리 비엔날레 등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여하였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로 평가받는 그의 <1/24초의 의미>는 근대화된 도시의 모습과 함께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현대의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도시인의 생활을 불연속적으로 담아내어 현대인의 소외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런던 테이트모던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작가의 한국 전위예술의 첨병 역할을 인정받아 2017년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유병수_線(선)의 Image-78_1978_캔버스에 유채_115.3x71.3cm
유병수(1937~2008)
구축적인 화면과 회화성의 풍부함
평택에서 태어나 국립교통고등학교 토목과를 다닌 유병수는 1958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해 1963년 졸업했다. 재학 중에 화우들과 1960년에 ‘덕수궁 벽전’을 기획했고 동시에 《벽동인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유병수는 그해 국전 서양화부에 출품해서 입선한 바 있었다. 졸업 후 잠시 수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64년 영남고등학교에 부임하면서 대구로 왔다. 1967년 경북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60-70년대 그의 작업은 당시 젊은 작가들의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의 범주에 있었다. 비정형적인 채색과 붓질 표현에서 기하학적 선의 패턴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방향으로 변화과정이 두드러져 보이는 시기다.
1972년 계명대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같은 해 신조회의 창립동인이 되었다. 당시 작업 역량을 성숙해가는 과정이 작품에도 반영되는데 1970년대 후반부터의 작품에는 화려한 채색을 줄이고 갈색 톤의 중후하고 울림이 깊은 화면을 추구했다. 단순한 붓질의 반복으로 화면을 구축하고 구조화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1990년대 원숙기를 맞는 그의 작품은 약동하는 생명감으로 충만한 상태에 이르러 자유로운 필치와 발랄한 색채까지 자연의 주제와 모티프를 채택해 추상으로 생명감을 구현했다. 그 후로 그는 그간의 “부단한 조형 체험을 통하여 (추상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키는 일로써 화면에 골판지나 각종 폐지 등의 오브제를 도입하고 콜라주 방식을 응용하여 독특한 개성적인 화면을 구축하였다.
2003년까지 대학 강단에서 교육에 힘쓰는 한편 11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는 성실성을 보였다. 전시기에 걸쳐 다양한 스타일의 깊이 있는 화면 구성과 비구상 작품세계를 추구했는데 2015년 개최된 유작전에서 마지막 시기에 만들어진 구상적인 작품 한 점을 공개해 작가의 회화적 표현의 바탕에 있던 풍부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동진_原典(원전)_1974, 163×122cm, mixed media
이동진(1939~2015)
회화성의 본질을 성찰하던 작가
경북 안동 출생인 이동진은 1958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해 1964년 졸업했다. 재학 중에 《벽전》에 참여하였고 1961년 《벽동인전》 창립 동인이 되어 출품했다. 졸업 후에는 강원대학교에 미술교육과에 근무하며 제3그룹전, 앙데팡당전 등을 통해 작품 활동을 했다. 1978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초기 작품 경향은 당시 시대적으로 주류이던 앵포르멜 회화와 실험적인 오브제 설치 중심의 작업이었다. 1970년대부터는 문자를 모티프로 <원전(原典)>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1980년대에는 자연을 모티프로 하는 <자연 이미지> 시리즈로 바꾸어 추상표현주의 방법과 캔버스 작업을 계속했다.
1980년대 안동대학 미술학과로 오면서 대구화단에서 몇 차례 개인전을 가졌는데 1990년대에는 경북대 미술학과에서 미술교육을 맡으면서 대구의 추상 미술가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국전에서 몇 차례의 수상 경력과 경북미술대전, 대구미술대전 등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경북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퇴직한 후에도 지역에서 후학들을 만나며 제작 활동을 이어갔다. 1960년대 <벽전>, <벽동인전>에서 출발해, 1970년~80년대 사물의 본질을 탐구했던 시기 등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던 한국 현대미술의 작가들이 추구했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실험성이 높은 작품 제작에서도 유기적 재료를 통해 물화된 이미지로 나타나는 <자연 이미지>에서도 일관되게 자연의 원초적 형상을 주제로 하여 새로운 재료의 탐구를 하였고, 이후 조형적 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동진은 회화의 궁극적인 본질을 성찰하면서 자연의 대상에서 이미지를 찾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작가였다.
이영륭_淨土(Elysium 정토)A-103_1961_캔버스에 유채_193.9x259.1cm
이영륭(1940~ )
“지성을 뒷받침한 대담한 전진”
(1961년 개인전에 대한 장석수의 지상 평)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면서 일찍이 고향인 대구에 내려와 중·고교와 대학 강단에서 미술교육과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작품 활동은 1961년 재학 중에 상공회의소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비구상 추상회화 위주의 22점을 발표했는데 장석수가 지상에 평을 실어 큰 관심을 나타냈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아직 구상 작품이 일부 혼재되어 있고 추상화 정도에도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에 “미의식에서 가열된 분방한 역동감”이 있다고 평가했다. 1967년 제4회 개인전은 당시 김윤수의 평론이 신문에 실렸는데 이륭의 추상화(化)가 더욱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다수 화면 구성에 있어서 대담하게 ‘절단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임의적인 분할을 조형의 기존 문법에 과감한 도전이요 모험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과감한 화면 절단으로 발생한 긴장된 화면이 색채대비나 질감 등의 변화로 인해 미적 시각적 감각에 어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1963년 김구림 등과 함께 ‘앙그리(ANGRY)’의 창립 동인이었으며 1972년에는 신조회 창립에 참가하여 지난해 12월 50주년 기념전을 가졌다. 현재 대구원로화가회, 신조회를 이끌고 있으며 현역작가로도 활발히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03년 이인성미술상, 2005년 대한민국 황조근정 훈장, 2010년 대구예술 대상을 받았다. 1960년대 혼란스러운 시기의 작품 <정토(淨土)>, <생성(生成)> 등은 비재현적이고 격렬한 갈색조의 붓질이 특징이며, 최근에는 강렬한 푸른색 계열의 색채를 사용하여 범 자연주의적인 예술관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chapter 4 디지털 아카이브_3층 2전시실
오정향
오정향(1977~)
디지털 아카이브 작업과 재해석
대구 출생이며 경북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08년 아시아프(ASYAAF) 선정 작가, 2011년 올해의 청년작가상(대구문화예술회관)을 받았다. 2009년부터 디지털 영상으로 작업 영역을 확장하여 미디어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일상 공간의 기록과 기억을 주제로 공간의 기억을 수집하고 가상의 공간을 구현하는 작업방식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 작업에서부터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Interactive Media Art),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 AR, 홀로그램(Hologram)과 같은 변주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선보이며 작업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장르의 결을 달리하는 동시대 작가의 시각으로 근현대작가들의 추상미술을 재해석하는 미디어아트와 모든 연령의 관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프로젝션 맵핑으로 움직이는 아카이브를 구현해 실물 아카이브와 함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는 작업으로 참가하고 있다.
전시서문
대구의 추상미술
현대적 조형 이념의 수용과 실천가들
Ⅰ. 자연주의적 양식으로부터의 전환
일제 강점기 한국 근대미술가들에게 동시대는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당연히 근대미술가들이 인식한 동시대란 나라 잃은 피지배국 상태의 현실과 그러한 현실 의식에서 비롯된 주권 회복 그리고 민족적 주체성의 확인과 연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숙명적으로 던져졌을 질문이 아닐까 싶다. 이 현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개별 작가들의 창작 문제로 옮겨와 생각해보면 화가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문화유산이나 풍물 또는 관념적인 정체성에 눈길을 돌려 그것들을 심미적으로 재현하려고 했고 현대적인 방법으로 구현하는 가운데 민족 예술적 의의를 찾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들에게 현대적인 방법이란 처음 도입한 서양화의 자연주의적 기술이었다.
그렇다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 미술인들은 어떠했을까. 마땅히 지난 시대의 식민주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새로운 시대의 전망에 부응하는 참신한 양식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의지는 순조롭게 관철될 수 없었다. 예기치 못한 나라의 분단과 전쟁의 비극적 상황에 돌입하게 되어 공동체의 삶은 참담한 좌절을 겪게 되고 현실은 또다시 모순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미술계에 혼돈의 힘든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작가들의 예술혼이 역경 속에서도 지지 않고 살아나 새로운 양식으로 국면의 전환을 일으키고 있었다.
변화의 시작 : 1952년 《대구화우회전》
해방과 독립의 과도기를 보내는 중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미술계에도 당연히 심대한 타격을 가해 지층을 완전히 흔들어놓았다. 대구화단도 물론 전쟁 중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란 속에서 많은 피난 작가들이 대구로 내려왔고 더러는 종군 화가단체를 결성해 전선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1952년 아직 휴전이 결정되기 전 대구의 미술인들은 단체를 조직하고 문화총연합회 경북지부 후원으로 그해 5월 미국문화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서동진과 주경, 이복, 박인채, 김우조, 변종하 등 27여 명으로 대구의 신구(新舊) 세대가 거의 모두 참여하는 규모였다. 이 전시에 당시 미국공보원 원장을 맡고 있던 주경도 참여하고 있는데 뒷날 그는 우리 미술사상 최초로 추상화 작업을 시도한 작가로 알려졌다. 주경은 이 전시의 의미를 “죽지 않고 살아있다”라는 즐거운 표식이라고 서문에서 썼다.
전쟁이 끝난 1953년 이 단체는 제3회 전시회를 같은 장소에서 열었는데 회장에 서동진, 부회장은 주경과 손일봉으로 역시 재구(在邱) 화가들을 망라해 조직했다. 서동진이 쓴 제3회전 서문 속에는 이렇게 전란의 도중에도 대구에서는 신구 미술인들이 총집결하여 조직을 결성하여 저마다 창작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고 단체전을 개최하는 뜻과 거칠어진 민심과 전쟁의 상흔을 다독이겠다는 예술가들의 사회적 소명 의식도 잊지 않고 포함했다.
게다가 제1회전과 제3회전 사이에는 《대구미국문화관 제5주년 기념 축하 미술전람회》가 있었다. 1953년 6월 휴전 직전에 개최된 이 전시회에 출품 작가들은 기존 ‘대구화우회’가 중심이 되고 거기에 당시 피란지 대구에 머물던 작가 다수가 참가하여 구성되었다. 출품 작가는 무려 38명이었다. 이렇게 피란지 대구로 내려온 적지 않은 화가들까지 더하여 그룹전과 개인전이 연이어 열렸던 상황을 1953년 말 대구의 작가 백락종은 당시 일간 신문에 “전시회 수는 전전을 훨씬 능가했다”라고 명확하게 기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자연주의적 기조가 극복되고 있음이 목격되고 있다는 내용을 강조했는데 대구화단에 새로운 표현주의적인 특성이 나타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 그러한 변화는 1950년대 대구와 한국 근대미술의 지배적인 양식이 추상화되는 전환이 일어나는 조짐을 시사하며 대구화단이 그런 동인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당시 세 차례 《대구화우회전》 개최에 출품한 작가는 다음과 같다.
제1회전(1952.5.) : (동양화) 청전, 이상범, 죽농, 서동균, 배정탁 (서양화) 주경, 서동진, 이복, 오석구, 박명조, 백태호, 손일봉, 백락종, 민영식, 김우조, 윤경진, 이경희, 배명학, 김윤찬, 윤세붕, 강우문, 김용환, 문영천, 서병기, 변종하, 박인채 , 하천준, 김장훈, 라재수
제2회전(1953.6.) : 《대구미국문화관 제5주년 기념 축하 미술전람회》
변종하, 강우문, 라재수, 백락종, 박인채, 함대정, 주경, 신석필, 박성환, 이복, 서동진, 김준식, 이경희, 김순연, 유시원, 조병덕, 박항섭, 문선호, 김종복, 김영기, 이상범, 오석환, 서동균, 배정탁, 조건, 조규영, 최창정, 박명조, 김성복, 김우조, 김응진, 황경도, 한국동, 배명학, 장석수, 이명암, 민영식, 김만술
제3회전(1953.10) : 서동진, 주경, 서동균, 배명학, 박명조, 이복, 박인채, 윤세붕, 강우문, 백락종, 김장훈, 김우조, 장석수, 이경희, 오석구, 민영식, 김윤찬, 백태호, 배정탁, 임충묵, 윤경진, 문영천, 변종하, (故)이경희
Ⅱ. 1950년대 후반 : 전후 미술과 추상화(抽象化)
전후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재건이라는 국가 정부의 슬로건이 사회의 중심 이슈이던 시대가 시작되었다. 보수적인 미술인들은 자연주의적인 구상양식을 통해 변화된 생활에 순응적인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기성세대들에게 저항적이던 젊은 작가들은 현대성이라는 미학적 가치의 동시대 조형 이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추구하는 표현양식은 바로 비구상적 추상화를 향한 것이었다. 추상화는 이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시대적 모순을 돌파하는데 기존의 양식이나 방식은 정체(停滯)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과연 추상은 적절한 방법이었을까. 당장은 구습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시대성을 지향하는 미술에서의 타개책이자 수단으로서 당위성을 부여받은 듯했다. 또 한편으로는 추상적 미학은 마치 지향점이자 목표로 느껴지던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처음 서양미술이 소개될 때는 재료도 방법도 낯설었다지만 사실적인 표현양식이 가진 현실감 있는 재현적 효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즈음 이미 서구에서는 그 단계를 훨씬 넘어 추상이라는 현대미술로 발전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보다 반세기 먼저 서양미술을 받아들인 일본 화단은 유럽의 19세기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영향을 차례로 받은 세대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지마는 일부 인상파 이후 양식과 모더니즘적 색채를 띠는 다양한 작가도 공존하며 화단의 폭을 훨씬 넓혀가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초기 유학생들 대다수는 사실적인 구상미술을 익히는 데 만족했었겠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신경향을 찾아 주목하고 벌써 진보적인 조형 이념을 받아들인 작가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자발적으로 추상미술을 실험하게 된 주경 같은 작가도 있고 구상미술로 시작하여 점차 진취적인 미학의 실천 쪽으로 옮겨 간 남관이나 손동진 같은 작가도 있으며 오직 추상미술에서 자신의 주제를 발견하고 개성을 꽃피운 김환기나 유영국 같은 작가도 있었다. 지난 2000년 포항시립미술관은 영남지역 출신 작가 중에 추상적인 작품 활동을 펼쳐왔던 선구적인 추상화가들에 주목하여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을 다시 보게 하는 전시를 개최한 바 있었다. 주경, 남관, 유영국, 정점식, 장석수, 손동진 등 한국 근대미술에 괄목할만한 자취를 남긴 이들 가운데 유난히 이 고장 출신 작가가 많았다. 그래서 그 전시는 한국추상미술의 발전에 공헌한 그들의 개성 있는 미학을 재조명한다는 측면과 이들을 모두 같은 시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공통의 배경으로 묶어 재맥락화해보자는데 의미가 있었다. 이번 봉산문화회관의 8월 기획전은 좀 더 대구를 중심으로 1950-60년대 나아가 1970년대 추상미술에 다가가 보는 전시가 될 것이다.
1956년 《대구미술가협회》
1956년 2월 정점식, 강우문, 조수호, 장석수, 서석규, 이복, 신석필, 정준용, 김윤찬, 김종훈 등은「대구미술가협회」를 결성해 미국문화관 화랑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우선 앞서 서동진과 주경 그리고 손일봉 등이 신진 작가들과 함께해 창립한 ‘대구화우회’의 구성과는 완전히 세대교체를 이루며 새로운 인물들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 구성에 이복, 장석수 등은 공통되지만 정점식처럼 주도하는 중심인물과 서석규, 정준용 등이 바뀌었다. 이들은 새로운 의지와 각오로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모던아트’를 향한 강한 열망을 드러내며 기성세대로부터 변화와 혁신을 외친 젊은 미술가 그룹으로 보였다.
미술평론가 권원순은 “당시 작가들 대부분이 자연주의적 표현 방법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들은 회화 정신에 입각한 표현방식의 자유와 새로운 조형성을 탐구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들의 카탈로그 서문에서 주장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현실사회의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이와 무관하게 피상적인 자연묘사에만 몰두하는 기성작가들의 무책임한 경향에 대한 반발인 것으로 이해된다.
“변동하는 사회나 이체(弛體)되어 가는 일단의 인간군상을 앞에 두면서 고의로 이것을 회피하고 자신의 감동조차 느낄 수 없는 쇄말적인 묘사에 떨어지는 그러한 경향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며 자아 반성의 기회로서 이 전시회가 가지는 뜻으로 하고 싶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서도 “일찍이 대구에서 볼 수 없던 무게 있는 출품진용과 참신한 분위기로” 관심을 끈다고 소개했다. 이 말은 자연주의를 벗어난 추상화로의 양식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미술운동의 차원에서 회화적인 이즘을 앞세워 창립한 단체가 아니라서 작품에 획일적인 체계가 없이 제각각 개인들의 연합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 회원은 여전히 구상적 특성이 두드러진 경우라 하겠다.
대구미술가협회는 1956년 2월에 이어 11월 말에 다시 정준용, 강우문, 장석수, 신석필, 서석규, 정점식 등 6명이 참가한 제2회 전시를 연속 개최했다. 정점식은 〈풍매〉와 〈일식〉을 출품했고 장석수는 〈에츄드〉A를 냈는데 제목에서부터 작품의 추상적 양식화를 암시하고 있다. 반면에 신예 정준용은 독특한 구성의 〈칼치〉를 출품해 주목받았다. 이때에도 언론은 “종전에 볼 수 없던 시험적인 제작 경향과 작품의 행동성”을 주목하는 보도를 냈다. 한편 제2회 전시에서는 특별히 새로 부임한 맥타가트 공보원장의 소장품으로 ‘구미현대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구미술가협회’는 1957년 5월에 신석필, 장석수, 강우문, 정준용, 서석규 등 5명의 25점으로 제3회전이 이루어졌다. 출발을 선언할 때 10명의 화가였던 것이 5명으로 줄어든 것은 1957년 4월에 정점식을 위시한 이복, 백락종, 라재수, 이경희, 조수호, 박광호 오석구, 김수영 등이 따로 ‘경북미술가협회’를 조직했기 때문이었다.
1957년 경북미술가협회
대구미술가협회의 창립 동인이던 정점식, 이복 등을 중심으로 1957년 4월 「경북미술가협회」를 발족시킴으로써 기존 대구미술가협회(장석수)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지상을 통해 경북미술가협회의 창립전시 내용을 분석하여 반박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화단 내부의 갈등을 표출시킨 최초의 사건이지만 그 과정에 개별 작가들의 조형 성격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모습의 일단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형 이념으로 인한 분열이 아닌 이상 언론은 두 단체의 연합을 제안하며 분열 자체를 비난했다.
경북미술협회의 창립전은 1957년 4월 대구 미국공보원화랑에서 개최하였는데 모두 18명의 31점이 출품되었다. 출품회원의 한 사람인 최상학은 “본래 강렬한 주장으로 집합된 것은 아니지만 상호의 밀접한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대단히 자유스러운 미술 단체로서” 의의가 있다고 했다.
경북미술가협회 창립전 출품 작가들에도 ‘대구미술가협회’와 마찬가지로 비구상계열과 구상계열이 혼재해 있는데 비구상계열에 “정점식의 〈실루엣〉, 박광호의 〈도색을 위한 콤포지션〉과 〈서예〉, 이복의 〈정물〉, 김수영의 〈공장지대〉 등이며 구상계열에는 이경희의 수채화 〈해운대〉, 오석구 〈동무(童舞)〉, 강홍철 〈풍경〉, 백락종 〈石榴〉, 金龍鎭 〈石榴〉, 라재수 〈불상〉이 있었다. 이 단체는 1958년 봄에 제2회전을 가을에 다시 제3회전을 개최하였으나 이런 혼합적 양식 구성 탓인지 단체로서 뚜렷한 성격을 지니지 못했다는 평을 받으며 이경희, 김수영, 오석구 등 일부 회원들의 탈퇴로 이어졌다.
이상의 두 그룹에 참여한 1950년대 후반 대구 작가들 가운데 다수가 추상적인 작업 성향을 띠었다. 정점식, 장석수가 그랬고 서석규, 이복, 박광호 역시 화면에 추상적 요소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들 외에도 김수영과 정준용의 화면에도 추상적 요소가 현저해지는 변모가 있었다. 당시 지역의 중견작가로서 주경은 서양화가 국내에 소개되고 얼마 되지 않은 1923년 10대 후반 나이에 추상화 〈파란〉과 1930년에 〈생존〉을 제작했던 우리 근대미술사상 매우 이례적인 작가였다. 그는 해방 직전 일본에서 귀국 후 대구에 정착했는데 추상화의 지속적인 추구는 없었어도 필요에 따라 추상의 보편적인 형식과 원리를 잘 사용했다.
여기에 덧붙여 지역의 출향 작가들 가운데서도 선구적인 추상회화 작가들이 있었다. 먼저 1911년 청송에서 태어난 남관과 경주 출신 손동진 등의 경우 일찍이 일본 유학 후에 다시 유럽행을 결행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유럽화단과 만나 그곳에서 탐구한 내용을 보면 우리 근대미술에 주어졌던 향토성(locality) 구현이라는 목표를 상기시킨다. 비구상 회화를 통해서 세계미술의 한가운데로 접근했다가 결국 자신들의 개성적인 표현은 동양적이거나 한국적인 주제에서 얻게 되었던 작가들이다. 변종하 역시 이 도시 출신으로서 전통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가이다. 거의 모든 주제에서 우리 땅과 사람들에 대한 정서를 투영시키고 있다. 일찍이 고향을 떠난 이들의 야심적인 도불 유학이 그런 정서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게 해준 계기였음은 말할 나위 없겠다.
Ⅲ. 1960년대 : 추상주의 미술의 확산
모든 그림은 추상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20세기 전반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낸 추상주의는 서구 미술사의 특정한 시기에 발생한 역사성을 띠고 있다. 자연주의 미술의 오랜 전통 끝에 새롭게 등장한 경향으로서 역사적 문화적 맥락과 함께 고려할 때 그 의의를 충분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서양미술을 받아들인 짧은 역사 속에서는 서구의 추상미술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일찍이 추상적인 조형 탐구를 시도했던 작가들은 인정을 얻기까지 많은 저항을 받았을 것이다.
나아가 추상미술의 인식을 어느 정도 하더라도 그것의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종의 강박관념마저 안겨주었다. 그런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추상미술로 우리의 정서를 추구하고 개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미에 있어서 모험적인 정신이나 개척자적인 태도를 지닌 실천가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들이 거둔 미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는 이러한 시대적인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창작 여건을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63년 《앙그리》 그룹과 추상미술의 확산
1960년대 곤궁한 시대에 예술을 하는 현실의 불안을 떨쳐버리고 함께 새로운 희망과 가치를 찾으려는 기성작가들의 결합은 점차 수가 늘어났다. 훨씬 더 뚜렷한 의식을 표명한 20대 젊은이들이 결성한 《앙그리(Angry)》 그룹의 일부 작가들에게서는 앵포르멜의 양식적인 지향이 보였다. 1963년 창립전에 김구림, 김인숙, 김익수, 김신현, 권영호, 정도화, 정주호, 이영륭, 유가매, 마영자, 박광호, 박곤, 박휘락, 박설 등이 참여했는데 새로운 감각과 신선한 조형 이념의 탐색을 보여 주었다. 특히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온 신세대들의 참여는 대구화단에 젊은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1964년 《앙그리》 제2회전에 대해 정점식은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젊은 층으로서 구성되어 있고 이 세대를 증언하려는 전위단체이며 경북미술계의 ‘호프’ 격인 존재이다. 그만큼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뚜렷한 궤도를 찾지 못하고 젊음의 패기가 부족한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기보다 경계의 시선을 동시에 던진 것이다. 이들 가운데 김구림은 이미 1959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 후원 단체였던 《황토회》의 백락종은 그를 두고 “창조하는 모색을 즐기는” 작가라는 소개를 서문에 썼다.
이영륭 역시 이미 1961년에 개인전을 가졌는데 장석수는 “미의식에서 가열된 분방한 역동감”이 있다는 인상을 받음과 동시에 “지성을 뒷받침한 대담한 전진”이라고 평했다. 이영륭의 추상미술에 대해서는 1967년 그의 제4회 개인전을 보고 쓴 김윤수의 글을 통해 당시 젊은 추상작가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글의 제목은 “추상회화의 시각 조응”인데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미술로 언급되던 모더니즘 양식의 작가에 의해 실험적으로 펼쳐지는 작업을 두고 낸 비평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요지는 추상화란 미적 규율의 거부에서 출발해 새로운 시각언어를 창조하려는 것이며 정형의 타파라는 개념의 과감한 도전이요 모험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회화는 미적이어야 한다는 개념과 종합을 꾀하려는 시도나 지나친 감각 추구로 흐르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당시의 추상회화가 맞닥뜨릴 일단의 위험(모순)을 지적했다.
1972년 《신조회》 결성과 추상미술의 성숙
유신과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침묵이 강요된 한편 각종 개발과 경제성장으로 생활 수준이 향상되기 시작하던 때이다. 힘겹게 빈한한 시대를 돌파해온 예술의 표현 충동이 현대 미술운동 속에서 이전보다 더 급진적으로 아방가르드나 실험미술이란 이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또 억압적인 분위기에 대한 저항의 은유적 몸짓으로도 해석될 예술적 실천들이 ‘행위예술’을 포함해 자유로운 조형 실험을 추구하는 다수의 그룹을 탄생시키던 때였다.
지역의 경제 환경도 향상되려는 조짐으로 현대적 상업 전시 공간으로 백화점 갤러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갤러리 개관 기념전의 초대작가들을 통해 본 대구화단 작가 구성의 특징은 1970년 초까지는 크게 구상과 비구상, 사실과 추상 계열로 나누고 있었다. 특히 1971년 대구백화점이 화랑이 개관하면서 〈제1회 향토작가초대전〉을 개최했는데 작가의 구성이 이런 경향을 반영했다. 당시 구상미술 계열에서는 전통적인 순수 자연주의 미술을 계승하면서도 자유로운 조형을 추구해 대중과 소통을 지향할 것을 목표로 했다. 한편 추상미술의 작가들은 1972년 《신조회》 그룹의 조직으로 대구화단에서 비구상, 추상 양식의 모더니즘 작가들로 더욱 뚜렷해진 점이 있다. 대표적인 작가들은 창립전에 정점식, 서석규, 박광호, 장석수, 송부환, 유병수, 이륭, 정인화, 박종갑으로 구성되었다.
《신조회》 는 1970년대 급변하는 사회적 정세와 미술계의 새로운 조류 변화를 눈앞에 두고 기존 추상미술 경향의 중견작가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보수적인 자연주의 양식의 미술이나 구상미술 계열에 대응해 추상미술의 순수한 조형주의를 옹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시험적인 개념미술의 시도에 대응해 미술의 본질을 묻는 탐구적 자세를 견지하려는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1972년 창립 동인들의 결성 동기를 보면 시시각각 변모하는 현대사회에 뒤처지지 않고 현대예술의 급변하는 조류에 낙오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또 오늘의 상황을 충실히 분석하여 그 속에서 내일의 비전을 만드는 것이 예술 창조의 본연임을 믿는다는 집단적 지성이 읽힌다. 말하자면 혁신적이고 저항적인 신진세대와 달리 어느 정도 현실의 조형 질서를 인정하면서 그러나 현실 안주에 멈추지 않고 미래를 위한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탐구적 정신을 정체성으로 한다. 따라서 예술사조에 있어서 보수적이거나 퇴영적 사유에 멈추지 않기 위해 한때 진보적이었던 양식적 사고를 성찰하지만 아주 도발적인 실험이나 급진적인 태도와는 거리를 두는 변화와 자기 계발을 지향하지만 과격한 실험적 태도는 지양하는 양식적 자세를 가진 작가들이었다.
《신조회》 창립 이후 그 영향은 ‘현대 미술운동’의 부상이라 하겠다. 1974년에 《대구현대미술제》가 개최되면서 동시대 예술의 적극적인 실천에 뛰어들 젊은 작가들이 대구로 모였다. 1975년 동시대 예술의 지평을 확대해 나가겠다는 의지로 결성된 《35/128》 그룹과 현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표명하며 이강소, 박현기, 최병소, 이묘춘, 문곤, 황현욱 등으로 구성된 《대구현대미술작가회(D.C.A.A.)》가 결성되었다. 보수적이고 전통이 깊은 도시에 역설적으로 전위미술의 추진력도 강해서 《대구현대미술제》는 전국적인 규모로 1979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 진행되었다. 1975년 결성된 「직전」도 대구의 추상미술 경향 작가들의 단체였다.
이제 추상은 20세기 모던아트의 한 특성이었고 추상화(抽象化)가 한때 진보적인 방향을 가늠하는 기준처럼 생각되어 오직 독창적인 내용과 표현의 참신성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었던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한때는 논리와 주관들이 도그마가 되어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압박하기도 했다. 특히 추상 미술가들은 개인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든 예술의 보편성이나 시대적 당위성 그리고 지역적 특수성 같은 문제들을 함께 고민해야 했고 동양적인 미학,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해야 한다는 관념을 공유한 채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바로 그 작가들이 각자 개성적인 필법을 개발하고 독특한 감각을 추구해 이룬 결실이 오늘 우리 근대미술사의 중요한 유산들이 된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미술이라는 관점에서 예술의식의 변천이 개성적인 작품 속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각인되어 이 작품들을 우리는 근대 화단의 경과와 함께 추적해가며 각자의 조형의식이 노정한 자취들을 음미하게 될 터인데 또 다른 현실의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과 감동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협력기획자 김영동(미술평론가)